2014년 4월부터 바이블톡 묵상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7년을 꽉 채우고 이제 8년 차에 접어듭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살아가기 분주한 성도들에게 어떻게든 영의 양식을 먹여보겠다고 무턱대고 마음 주시는 대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래도록 묵상 글을 나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어떻게 글을 쓰고 무엇으로 소재를 삼아야 하는지, 지금이 어떤 트렌드로 흘러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내 수준에서, 내 생활에서, 내게 주신 것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것 뿐 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수준조차 그 때 글을 읽어보면 참담할 정도입니다. 맨 처음 보낼 때는 2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다보니 아침마다 직접 보내드리는 분이 100명이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또 바이블톡을 읽고 나누는 분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모바일사역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 글이 책이 되었고 라디오방송이 되었으며 저의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함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의 양식이 된다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일상에서의 고백, 내 생각과 말씀의 충돌, 삶의 나눔 등 때로는 목사이기 이전 인간으로의 고뇌를 담고 가감 없이 감정을 풀어놓으며 가정사를 노출하면서까지 나눌 수 있는 이유는 영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나 자신의 삶을 나눴음에도 누군가는 왜 자신의 이야기를 쓰냐고 독설을 뿜어내기도 했고 매일처럼 보내주는 내 삶의 고백을 가치 없이 여겨 버리기도 했으며 그런 것까지 나누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목사가 너무 격이 없는 것 아니냐는 푸념 섞인 비난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바일사역에 하나 더 추가된 것이 있습니다. 글을 쓰고 복사해서 단체로 보내는 것이 아닌 한 명씩 꼼꼼하게 나누는 일입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바이블톡을 받는 분들을 위해 중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닌 나눔을 통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고 빈 곳을 채워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매일 만나 없이 살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삶을 이끌어주시고 보호하셨던 것처럼 제 삶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매일의 묵상을 통해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셨고 나눌 수 있게 하셨으며 의미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6년이라는 시간을 바이블톡으로 다루시고 채워주고 계십니다. 우선순위를 세워 삶의 질서와 체계를 갖추게 하셨습니다.
묵상을 통한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고백이 내 믿음이 될 뿐 아니라 고백이 쌓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귀한 도구가 되며 거룩함을 잃지 않는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되고 내 고백이 되며 기도요 노래가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