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 하나 있습니다. 목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한 마음입니다. 답답함을 넘어 아프고 아린 부분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로 고백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전부로 가르치고 전부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전부가 아닙니다. 시작점일 뿐입니다.
영화 메트릭스 1편을 보면 주인공 네오가 모피어스를 만나 제안을 받게 된다.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선택하는 일이다. 파란 알약을 먹으면 살아왔던 그대로 지금의 삶이 전부라고 믿고 살 수 있고 빨간 알약을 먹으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네오는 빨간 알약을 먹고 메트릭스 세계와 진짜 세계를 오가며 인류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이 영화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빨간 알약을 먹는 것과도 같습니다.
가짜 가치, 가짜 안식, 가짜 평화, 가짜 복음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과는 확연하게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관점, 가치, 기준, 생각, 마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고백에서 머물러서는 불가능합니다. 고백의 자리에서 삶의 자리까지 연결되어지지 않는다면 구원의 열매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으며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는 행위가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섬김 받는 것이 아닌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한계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되기 위해 힘쓰는 삶을 빼놓고 믿음, 구원을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힘을 빼고 내려놓고 맡기는 삶을 살 수 없다면 어떻게 백성이요, 자녀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믿음과 행위를 묶어 삶의 예배를 강조한 야고보서 말씀으로 강해설교를 하고 이를 책(입증책임)으로 엮고 극동방송과 CBS를 통해서 인터뷰를 했었습니다. 가장 진지하게 들은 질문도 같았습니다. “믿음보다 행위를 너무 강조하는 것 아닌가? 행위로 믿음을 판단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합니다. 짧게 대답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기에 사랑을 고백하면 사랑하는 것처럼 믿음을 고백하면 이에 따른 순종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갈무리했지만 한국교회의 민낯을 너무 여실히 볼 수 있었기에 많이 답답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향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삶의 주인이 나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왔다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은 주인이 바뀌지 않았기에 고백에만 머무는 것, 두 주인을 섬기고 있기에 삶의 정체성이 없는 것,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편리한 것을 찾기에 믿음의 수고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복음’을 버리고 오직 참된 복음, 오직 그리스도만을 향하는 수고를 기꺼이 행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서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