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소림사를 소재로 한 쿵푸이야기를 참 많이도 듣고 많이도 보았습니다. 이 정도의 수련은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악한 세력이 공격하고 이를 방어하는 이야기는 당시 모든 남성들의 마음을 매료시키고도 남았습니다.
소림 쿵푸와 같은 무도는 누군가를 꼭 이기려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세월 가운데 수련했음에도 나조차도 지킬 수 없다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중국의 많은 무도인들, 오랜 수련으로 나름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격투기 선수와 싸움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전부 허망하게 격투기 선수들에게 당했습니다. 폼과 자세를 잡아보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룰이 격투기 선수들에게 유리한 조건일 수 있었지만 너무 허망했기에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늘 이론과 실제가 다릅니다. 이처럼 무도의 모습도 그렇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품세를 익히고 오랜 시간 동안 수련을 해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다면 의미가 퇴색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삶을 살아내는 우리에게도 아주 정확하게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봉사와 헌신을 하며 성경말씀을 수십 번을 읽어도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순종함의 행함이 없다면 너무나도 허망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옛날에는 소금이 금보다 귀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소금은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버려지고 밟히고 체이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금의 모양만 있을 뿐 맛을 잃었기에 격투기 선수에게 허망하게 패하는 무도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된 것 같습니다. 수련과 훈련을 열심히 하며 그럴듯해 보입니다. 경건해보이고 거룩해 보이며 무언가 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큰교회의 직분까지 있다면 세상 사람들도 대충 대하지는 않게 됩니다. 하지만 늘 여기까지입니다.
군대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매번 같은 훈련을 끊임없이 시킵니다. 어느 정도 몸에 익어 대충해도 될 법할 때도 어림없습니다. 폭탄이 터지고 동료가 죽어가는 상황 가운데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몸이 알아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전을 위한 훈련입니다. 사실 훈련은 실전을 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충 시간을 때우고 작전을 수행하는 척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싸움이 벌이지지 않도록 억지하기 위한 보여주기 훈련이 된다면 실전에서는 당나라 부대가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백전백패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그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훈련되어져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과 상태 가운데서도 소금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내 몸이 그렇게 반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고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으며 승리하며 품고 섬기는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보여 주기식의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시대가 아닙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이기는 시대도 아닙니다. 사회적 위치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도 아닙니다. 실력이 있어야 하는 실전의 시대입니다. 겸손함으로 기도의 자리를 붙들고 부르심에 합당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후서 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