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이 닥쳐오거나 무언가 더 잘된다 싶을 때 우리는 방법을 찾습니다. 어려울 때는 돌파할 수 있는 방법, 잘될 때는 더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이것이 우리 생각의 한계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부흥되어질 때 교회 건물을 짓습니다. 더 부흥되기를 원해 건물을 짓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프로그램을 들여옵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해야 좀 더 활성화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기도의 자리를 벗어나 기웃거립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어떤 것이 담겨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멋지게, 경건하게 성전을 지어놓아도 성령님께서 임재하지 않으시는 곳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이 아닌 교회에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건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가 회복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은혜의 때가 아닌 선교의 때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모, 겉모습이 아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명품으로 치장하고 세련되게 꾸며도 내 안에서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성도가 될 수 없고, 자녀도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기도하는 것 필요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의 중심, 기도의 이유, 기도의 필요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다면, 성령님이 간구하기를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가지고 와서 분향단에 붙인 나답과 아비후를 멸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원하는 기도만을 줄기차게 간절하게 해온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회개를 통해 회복을 경험하고, 회복을 통해 사랑을 경험하며, 사랑을 통해 세워진 믿음인지를 상고해야 합니다.
모두가 부활만 하려고 합니다. 천국만 가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심어야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죽음 없이는 부활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예수와 함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우리의 기도는 분향단의 향기가 되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풀어놓아질 것입니다. 그 하늘의 뜻이 이뤄짐과 함께 우리 삶의 이유와 방향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내려놓을 것이 없다고 여길수록 그 간절한 마음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잘될수록 힘을 빼야 합니다. 다 뺐다고 생각할수록 더 빼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 하나님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 마음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내려놓아야 하나님을 붙들 수 있습니다. 힘을 빼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닌 오직 삶의 주관자 되시는 성령님을 붙들고 말씀을 머금고 살아가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