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생각,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
내가 품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품게 하는 것,
내 감정과 생각,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생각하면 할수록 늘 너무나도 큰 차이를 느낍니다. 때마다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육의 것과 영의 것으로 생각해보면 더 선명하게 와 닿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잃었기에 세상에 포효하고도 남아야 할 지금 우리의 신앙이 초라해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내가 원하는 사랑에 머물렀기에 거룩함의 영성 뿐 아니라 야성까지도 놓쳐버렸습니다. 세상과 나와의 괴리가 아닌 하나님과 나와의 괴리감이 갈수록 커져 갑니다. 이는 곧바로 거룩함의 상실로 연결됩니다. 말씀이 진리 되지 못하고 때에 따라, 내 가치와 감정에 따라, 내가 받은 은혜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도합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관계로 와주신, 사랑으로 와주신 그 예수님을 이제는 우상의 자리에 올려놓는 격이 되어 버립니다. 때로는 두려움으로 복종하고 때로는 주시는 것에 감사함으로 따라가지만 마음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어떠한 것에도 미련이 없습니다. 그 사랑, 그 은혜를 향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깊은 묵상만 가득합니다. 망하게 하시면 망하리로다. 살리시면 살리로다. 죽으면 죽으리다. 늘 관계, 사랑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갑니다.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담대하게 그 어느 때보다 확신 있게 성령님의 인도하심만 따라갑니다.
순간마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찰나마다 내 생각에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옮겨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으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허망한 것이라도 채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육의 삶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의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왕 앞에 나아갔던 에스더. 왕비가 되게 하신 것은 오늘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알고 모든 것을 내어 드린 에스더. 에스더의 용기 가운데 함께 금식함으로 부르짖은 나라를 잃은 연약한 백성들.
성경을 읽지 않았을지라도 에스더와 백성들의 모습만으로도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실지 감히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티끌 같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이고 그 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며 신뢰하며 모든 것을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방법이 아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뢰했기 때문이며 그런 우리를 붙들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아도 괜찮습니다. 그 순간, 그 찰나 그 작은 믿음을 붙들 때 그 믿음은 전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살아주심으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