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시절, 내가 떠든 게 아닌데 공개적으로 엄청 크게 혼났을 때, 친구가 잘못해서 다리에 금이 갔는데 그토록 좋아하던 담임 선생님이 그 친구 편을 들었을 때, 선배를 쳐다봤다는 이유로 아파트 뒤로 끌려가 구타당했을 때,
군대에서 동료의 잘못으로 함께 얼차려를 받고 밥을 먹다 식판으로 머리를 맞았을 때,
전도사 시절 교회에서 잘못이 없음에도 성도에게 끌려 내쫓김을 당했을 때, 식당에서 밥을 먹었을 뿐인데 술을 먹었다고 모함 당했을 때, 정의를 말했지만 공개적으로 배신자라고 낙인찍혀 좌천 됐을 때...
억울함에 대해 묵상하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기억났습니다. 물론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많았겠지만 이 정도만 생각나도 저에게는 엄청난 기억력입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억울했던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억울함을 넘어 충격이었고 아픔이었고 상처가 되었습니다. 알아주는 이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참담한 마음을 이야기할 곳도 없어 터질 것 같은 마음에 담아두고 오랫동안 마음앓이를 했기에 더 큰 상처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억울함이 있을 그 때, 당시에는 정말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고 다 때려 치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살아서 뭐하나? 나 혼자 정직하면 뭐하나?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면서 이 정도의 내 마음도 헤아려주지 못하시나? 다 필요없다!’ 그래서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마음을 열면 또 상처받을 것 같고 배신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것만 같아서 소심해져 갔으며 자존감은 깎여 나갔고 열등감과 분노는 계속 쌓여만 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 후부터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억울한 일이 발생해도 괜찮습니다.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정말로 파워풀합니다. 나를 지으셨고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며 지금의 모든 상황까지도 필요함으로 주신다는 믿음이 생긴 후부터는 모든 것이 괜찮습니다. 수치심이 너무나도 컸던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보내셔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그 때 나 스스로만 바라봄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나와 함께 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 그리고 감사만 가득합니다. 오늘도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일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존재하고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억울함을 경험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나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오늘도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내일도 주관해주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 뿐 마음으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만나면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믿어지면 맡기게 되어 있고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억울함, 두려움, 상처 받았던 때와 기류가 비슷하게만 흘러도 몸이 기억하고 반응하는 것을 선택하지 말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믿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억울함이 아닌 기대함으로, 상처가 아닌 감사함으로 기대하며 살아가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상 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