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고 밝은 근심은 없습니다. 근심은 어두운 것입니다. 아름다운 염려는 없습니다. 염려는 그 자체가 아름답지 않고 있는 아름다움도 깨는 것입니다. 평안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두려움 자체가 이미 평안이 깨어진 상태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근심을 밝게 보려고 하고 염려를 아름답게 포장하며 두려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결국 제정신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럼에도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합니다. 억척스럽고 고집스럽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전형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거기에 자신의 생각까지 덧붙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최선을 다한 거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자신이 힘껏 살아가며 이야기한 것이기에 진심으로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은 회피하지 않는 것, 합리화하지 않는 것, 사실을 사실로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합니다. “어떻게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나?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맞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근심할 만하니까 근심하고 염려할 만하니까 염려하며 두려워할 만하니까 두려워한다는 생각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근심, 염려, 두려움의 생각을 품는 순간부터 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아지 목에 매어 있는 목줄처럼, 소의 코뚜레처럼 그 순간부터 내 생각은 근심, 염려, 두려움에 매여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없을 수는 없어 맞닥뜨려야 하지만 매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로 인해 영향 받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인다는 것은 결국 이것이 통로가 되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생각과 말,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어둠의 영에게 먹이를 주며 선택권을 내어주어 매여 있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근심, 염려, 두려움이 전부되는 인생을 도대체 언제까지 살아가시렵니까? 깨어나야 합니다. 근심, 염려, 두려움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에 매여 속아 살아온 세월로 애통해 해야 합니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고 속지 않는 인생이 되어야만 합니다.
내 생각이 아닌 말씀을 선택함으로 날로 새로워지는 것과 본질을 놓치지 않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