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름 괜찮은 곳에서 살았던 것 같은데 생활은 늘 어려웠습니다. 상에 올라오는 반찬은 멸치볶음, 된장찌개 또는 된장국. 그것도 멸치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콩나물. 늘 배가 고팠지만 밥 먹는 시간이 기대되지는 않았습니다.
6-7살 때로 기억이 되는데 저는 동네에서 인사를 제일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인사를 하며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될 정도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인사를 잘해서 이쁘다며 100원의 용돈도 주시곤 했습니다. 그 당시 쭈쭈바가 50원, 핫도그가 50원이었기 때문에 양손 푸짐하게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슈퍼마켓에 가서 아이스크림 냉동고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 보면 어려운 형편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이런 걸 먹어도 되는 걸까? 다들 배고파 할텐데 나만 먹어도 되는 걸까?’ 백 원을 손에 꼭 쥐고 상가 지하 야채가게로 가서 콩나물을 사곤 했습니다. 백 원 어치면 정말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가벼웠고 한 가득의 콩나물로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마치 가장이 된 듯한 마음을 품고는 했습니다. 대견한 일만 한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그 가난, 먹을 것을 참는 것이 화가 나서 어머니 지갑을 털어 동네 아이들을 몰고 가서 모조리 써버린 적도 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배고픈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끼니를 거르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곤 합니다. 나를 위해 무언가를 사는 것이 죄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십 만원 넘는 물건 금액을 보면 심장이 뜁니다. 가난은 제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것을 늘 억누르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주눅 들어 사는 것은 제게 삶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이 모든 것이 감사가 되었고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공감해줄 수 있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상처로 인해 다시는 보고 싶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반면에 그것이 익숙해져 내 삶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결국 내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수도 없이 벌어진 아픈 일들을 감사함으로 선택했습니다. 가난과 상처들을 보지 않고 그 가운데서도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선택했습니다. 내 처지와 상태를 비관하지 않고 앞으로 쓰임 받을 것을 바라보기로 선택했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결단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은 시작됩니다. 예비하고 준비해놓으신 일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상처와 아픔, 과거를 직면하고 소망을 선택함으로 자위적 위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보니 과거의 아픔, 상처는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보니 가난은 더 많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해보니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빛을 선택하고 결단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 그 사랑하심을 경험하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1서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