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 왜 돈을 버는 형통함은 없고 사업에 실패하는 걸까요? 예수님을 믿는데 왜 건강한 축복은 없고 질병이 나를 찾아올까요?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그런 축복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은 몇몇이 있었을 뿐입니다.
어려움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닌 생명을 품고 본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결국 온전케 되고 옳고 바르게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동행하며 도와주시는 것, 이것이 진정한 형통이며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왜 나는 예수를 믿으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그렇게 믿고 있는 걸까요?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내가복음’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관점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필요한 곳에 떼어 붙여 만들어낸 신앙입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언약의 말씀을 받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과 더불어 전리품으로 주신, 나중에 성막 건축에 사용되어져야 할 은금과 패물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합니다. 그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할 제사장 ‘아론’은 그들과 동조하여 멋진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보며 이름을 지어주기까지 합니다. “지금부터 이 금송아지는 우리를 애굽땅에서 건져낸 여호와 하나님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제사장도 이를 동조하여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참담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복음’이 유일한 성경의 말씀은 아니십니까?
내가 만든 ‘축복’, ‘형통’이 혹시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붙인 것과 다름없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나만의 금송아지입니까?
열심히 살아도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씨를 열심히, 부지런히 뿌려도 그만큼의 열매를 거두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요? 이른비와 늦은비를 통해 수확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심을 때와 거둘 때, 일할 때와 쉴 때, 기뻐할 때와 슬퍼할 때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플 수도 있고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일하심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내가 생각하는 형통, 축복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자아가 생겨 제멋대로 하려고 하는 자녀와 정말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부모의 마음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이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만이 주님 되시는 올인하는 신앙이 될 때 진정한 형통, 축복의 은혜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겸손히 주님만 바라보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이사야 55: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