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 Church

큐티/공지

용기는 아무 때나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것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가치를 발하게 됩니다. 두려움 가운데 용기로 설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려야만 믿음이 되어 집니다. 

희망이 없어야만 소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없어질 때 비로소 애통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내가 쉽게 인식하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은 인식하기 어렵고 평소 내가 하던 욕심과 맞아 떨어지기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부될 때 분별되는 것이 유혹입니다.

정직은 윤리, 도덕적인 수준이 아니라 벌거벗은 모습처럼, 마음 속 은밀한 곳에 이르기까지 숨기는 것과 더하는 것 없이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정직 없는 예배는 예배될 수 없고 기도가 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은 애틋하고 좋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늘 받고만 싶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 상처와 아픔의 골이 다 메워지고 이웃의 아픔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흘려주신 그 사랑을 알고 경험해야만 유효기간이 없는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닌 흘려보내는 마침표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인내와 절제는 성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만 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 늘 말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그 은혜를 갚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라는 단어의 뜻 자체에 갚을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고 성경에서 읽게 되는 단어 몇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대부분 단어의 사전적 정의, 그리고 내가 살아온 경험이 보태진 정의에만 국한되어 말씀을 읽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단어의 사용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과 생각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말해도 서로 간 이해하는 폭이 다릅니다. 뉘앙스라는 것이 있고 삶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과 우리와의 삶의 경험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그 단어가 그 상황에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시선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돼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해석될 수 없고 원하는 대로 보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도 인정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말씀도, 내 행위도, 내 삶의 조각조각도, 가벼운 선택이라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서는 내 행위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씀 한 구절을 들고 나는 주님이 원하는 뜻대로 살았다고 외쳐본들 의미 없는 변명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살아내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로마서 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