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옳다고 여기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 방향이 나만의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평생 관행과 관례를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는데 내가 살아온 것이 또 다른 관행과 관례가 되었다면 어떨까요? 지금은 아니라고 여기며 힘껏 부딪히며 정의감 있게 살아가지만 완전히 한 방향 만으로만 바라봄으로 가장 중요한 일을 그르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떨까요?
내가 바라보는 관점은 늘 편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을 바라보고 있으면 뒤는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 하나쯤은 놓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동체시력이 좋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습니다. 바지 앞 지퍼를 하루 종일 열고 다녀도, 치마를 거꾸로 입고 다녀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다 내 생각 밖의 것을 만나면 당황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런 것을 놓쳤을 리 없다고 여기고 또 이런 일이 생길까봐 노심초사하며 더 꼼꼼하게 살아가려고만 합니다. 때로는 회피함의 정점을 찍습니다.
누구나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꼼꼼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칠칠맞아 그런 것도 아니고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성찰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은 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플 때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마음을 졸이며 괴로워합니다. 프로젝트가 잘못됐을 때 수없이 복기하며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려 애써봅니다. 부모의 어려움을 보며 마음속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내가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좀 더 힘써보려고 합니다. 내가 더 수고함으로 벽돌 하나라도 더 얹어보기 위해서 살려보려고 노력합니다. 내 한 몸 더 불살라 가족을 위해, 직장을 위해, 사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스스로를 향해 채찍질합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필요로 하는 것만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볼 수 있는 것의 한계로 인해 고정관념을 강화시키거나 편견이 더 깊게 자리 잡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만 옳다고 여기는 교만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있어야 할 것은 더 많은 수고와 노력, 희생이 아닌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나 홀로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고군분투해 보았고 자신의 수고의 한계를 경험했기에 힘을 빼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노인이 된 사람은 반대로 더 급해지기도 합니다.
다 볼 수 없습니다. 다 할 수 없습니다. 실수 없이 살 수도 없고 수고한 만큼 열매를 거두며 살 수도 없습니다. 선한 씨앗을 뿌려도 썩은 열매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한계는 늘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고집을 내려놓고 필요하신 하나님을 찾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29: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