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날 때 종종 유튜브를 봅니다. 즐겨보는 것 중 하나는 “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그램입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문제 있는 반려견을 찾아가 보호자와 함께 교육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훈련사가 강아지를 힘껏 다루다가 좀 풀어 줬다가를 반복하면서 반려견의 잘못된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해주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있어야 할 곳을 아주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세게 다룰 때 보호자가 눈물을 흘릴 때도 있고 경악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길 때도 있습니다. 내용을 보고 있자면 어떤 때는 내 모습이 보여 질 때도 있고 인간의 죄성과 겹쳐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찰이 될 뿐 아니라 성경 말씀이 더 깊게 이해되고는 합니다. 얼마 전에는 ‘항복’이라는 단어를 배웠습니다.
훈련사는 ‘항복’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항복이란, ‘규칙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 집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런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외부에 나가 사람들을 대할 때는 이렇게 해야 어울려 살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훈련사가 말하는 ‘항복’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나도 선명하게 정리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죽지 않고 있는 내 자아로 인해 힘겨워 할 때가 있는 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던 말씀이 겹쳐 보였습니다. 결국 나는 ‘항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어떨 때는 항복하고 있지만 또 어떤 때는 여전히 내 고집을 부리고 있구나… 마음을 다 드린 것 같았는데 아닌 이유, 더 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결국 온전한 항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반려견을 너무 사랑하고 예뻐해서 원하는 대로 해주는 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해주는 일이 반복되어 결국 반려견이 주인의 머리 위에 서 있는 상황으로 만들어져 함께 사는 일이 어렵고 불편한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반려견이 항복해야만 주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경험해서 그런 것인지, 나라를 빼앗긴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독재라는 것을 경험해서 그런 것인지 ‘항복’이라는 단어를 매우 부정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훈련사의 말을 듣고 ‘항복’이라는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다가왔습니다.
결혼하고 서로에게 적응하는 일은 서로의 규칙을 받아들여 우리의 규칙을 만들어내는 ‘항복’하는 과정이고 사춘기를 겪고 갱년기를 겪는 일 또한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계명을 지키게 됨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항복하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1서 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