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용납 받아보고 용서 받아본 사람이 누군가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난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난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은 절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결국에는 똑같이, 아니면 더 낫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경험해본 것이 결국에는 내게 남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운 것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자녀의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큰 사건, 위험한 것이 아니면 어느 정도는 용납하고 허용해서 경험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가르쳐주십니다. 고집부리며 우기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하면 그대로 두십니다. 그리고 보호하시면서 기다려주십니다.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선택함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닌 마음 깊이, 몸으로 체득할 수 있게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탕자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생존해 있음에도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괘씸하고 어처구니없는 철딱서니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면서도 재산을 떼어 내어줍니다. 스스로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늘 그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탕자는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아버지의 은혜를 구하며 다시 돌아옵니다. 이때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와 거지가 된 아들을 부여잡고 신을 신기고 옷을 갈아입히며 자신의 반지를 끼워줍니다. 아들로서의 신분을 회복시켜준 것만이 아닌 회개에 대한 용서의 답변까지 아들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허락해주니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 같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내 고집을 꺾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향할 때 길이 열리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인정하고 응답해주시는 것처럼 여길 때가 있습니다. 인정과 지지가 아닌 나만의 고집이었다는 것을 탕자는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길이 맞는지 아닌지는 걸어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내 뜻이었는지 하나님의 뜻인지, 내가 원하는 길이었는지 하나님이 내어주신 길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여정 가운데 스스로 마음을 살피고 고집이 꺾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되고 깊은 회개와 회복이 믿음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탕자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 누군가를 용납하고 품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삶으로 경험한 것, 직접 맞닥뜨리고 부딪혀보며 배운 것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자녀 됨이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나의 자녀 됨과 내 자녀에게 부모 됨을 알고 가르치는 오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21-24)